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

 

박혜수는 지난 10여 년간,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국 사회 기저에 내포된 집단 기억과 무의식, 그리고 개개인이 자신의 삶과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들, 손상되고 상실하게 된 가치들”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박혜수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으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져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거나 행동하게 하고, 그 데이터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때문에 그러한 관객들을 전시장 내에서 참여시키는 방법론이 중요한데, 작가는 주로 심리테스트와 같은 설문의 형태, 때로는 정신과 의사나 타로 점쟁이와의 상담, 타자기 입력이나 낭독 무대 세팅 등과 같은 일련의 특별한 예술 장치들을 고안해 왔다. 이 장치들은 작가와 관객, 그들이 속한 공동체 사이에서 고유한 경험을 매개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삶이 전시장 안으로 침투되고, 예술 작품이 개별적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 이웃, 타인들의 생각과 일상에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들이 능동적인 대화의 장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이 글은 박혜수의 대화 프로젝트 <보통의 정의>(2013-2018)를 구성하는 1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 형식적 특성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함의들을 단편적으로 나열한다.

 

[1] “보통이세요?”

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질문은 작가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동안 전시장에 방문한 익명의 관객들에게 던져 온 문구이다. <보통의 정의>(2013-2018)는 시간의 지속을 통해 축적된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적으로 공존하는 플랫폼이다. 이 안에서는 ‘대화’ 자체가 하나의 작품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3,000여 명의 관객들에게 심리테스트 성격의 설문조사인 ‘보통검사’를 실시하고, 이들의 답변을 수집, 리서치하는 작업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한국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하는 ‘보통’의 기준과 정의가 개개인의 일상적 삶과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지 고찰한 것이었다. 소위 말해, 이 사회에서 인정되는 ‘정상범주’란 과연 정상인지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공론의 장, 일종의 ‘포럼(forum)’으로 기능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방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조사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해온 작가는 최대한 다양한 의견을 수집하기 위해 각각의 연령층, 계층을 대상으로 내용을 모으고, 그 수집된 데이터들을 정신과 의사와 협업하여 사회적 징후들을 분석한다. 이후, 도출된 결과에 작가 자신의 예술적 해석과 개입을 시도하며 대화 아카이브, 설치, 시, 희곡, 퍼포먼스, 영상 등 여러 단계로 플랫폼을 성장, 진화, 발전시켜 왔다.

 

[2] 설문조사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상호작용의 과정 자체를 미학적 대상이자 형식으로 제시하는 박혜수의 작업은 그 미적 경험과 가치 판단에 있어 근대미학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그가 실행한 ‘설문조사’의 형식은 미술사에서 이미 1970년대 이후 한스 하케를 비롯해 제도 비평, 개념미술가들에 의해 수용된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다. 그러나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이 행했던 시도가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권력구조를 폭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면, 박혜수의 프로젝트에서 ‘설문조사’는 오히려 정신분석학이나 전통 신앙과 같은 심리적 차원에서 사회 구조와 인간 내적 영역의 관계를 탐구하고 현상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박혜수의 작업이 2010년대 이후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더불어 활발히 전개된 '크라우드소싱‘, ’크라우드보팅‘(웹사이트를 이용한 여론조사나 시장조사)과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예술적 형식으로 차용해, ‘다중'으로서의 주체가 이끌어내는 집단적 협업, 소통, 사회적 관계를 생산해내는 예술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기제로서 공동체 속 개별적 주체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에 주목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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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계 예술

무엇보다 이러한 미학적 형식은 예술의 형태(form)로서 물리적 오브제가 아닌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플랫폼이 오브제성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모더니즘적 미학으로부터의 변혁을 시사했던 20세기 후반 관계적 예술 형식에 기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관계적 예술 형식이 9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한 네트워크, ‘상호작용적 기술’에 대한 “비판적 반응”으로 발전했다는 점은 박혜수 작업과 연관하여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관계미학을 주창한 부리오는 이러한 새로운 예술의 형태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네트워크의 흐름 속에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내밀한, 사적 인간관계를 위한 열린 틈”[1]으로서의 공간을 구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틈의 공간은 바로 오늘날 “인간관계를 생산하는데 알맞은 사회성의 모델들을 구성”[2]하는 일종의 플랫폼으로서의 예술 형태를 말하며, 예술작품이 하나의 '기능적인 모델'로서 사회적 장 안에서 다소 가상적인 개입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설문조사’라는 사회과학적 시스템 안에서 관객들이 서로의 삶 속에 개입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스스로 분석하게 만드는 박혜수의 작업은 예술이 사회 안에서 그러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비정상적 풍경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형상화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비판하며,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

 

[4] 자연 법칙

그러나 이러한 미술사적 배경에 근거해 박혜수의 작업을 관계적 예술의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원래 조소를 전공했던 박혜수는 2000년대 초반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며, 시간의 축적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적 현상들을 관찰하고 채집해 가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을 선보여 왔었다. 돋보기로 빛을 모아 나무를 태움으로써 나이테를 그려나가는 그의 초기 작업 <태양 드로잉>(2001-2003)에서 작가는 태양과 함께 움직이며 그 시간의 변화와 축적을 자신의 신체를 경유해 개념화 시킨 바 있다. 이처럼 시간의 지속을 통해 미학적 상태가 생성되고 변화되는 과정 그 자체로서 ‘가변적’ 특성, 경험해야 할 지속적 시간을 예술의 형태로 제시한 박혜수의 작업은 네트워크의 발달, 도시화에 따른 사회 변화에 기인해 등장한 새로운 예술의 형식이라는 관계 미학의 배경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기인하였다. 박혜수는 시간의 지속을 경험시키는 자신의 예술 형식을 자연적 질서에서 따른 움직임, 변화, 성장, 소멸 등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구축한 것이었다. 특히 박혜수는 처음부터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자가 아닌 발견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발견을 타인들과 소통하고 전이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작업을 시작했었다. 즉, 교감과 정서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야말로 예술의 참여, 소통, 공공성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태도에 기저를 이룬 것임을 알 수 있다.

 

[5] 회사원

박혜수 작업의 형식적 특성이 ‘자연적 법칙으로서의 순환’에 대한 통찰에 기반 한 것이라는 사실은 다른 한편 그가 관객에 대한 생산자의 어떠한 선험적인 우선권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박혜수는 <보통의 정의> 프로젝트에서 설문 답안의 수집과 분석의 단계를 거친 이후, 1,000여명의 관객들로부터 받은 주관식 답변들을 따로 모아 이를 시나 희곡과 같은 문학의 형태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관객들의 답변을 문학의 형태로 변환시켜 발표된 텍스트는 다시 안무와 낭독 퍼포먼스 등 다원예술의 형식으로 변환시켰다. 특별히 그는 낭독 퍼포먼스의 퍼포머로 회사원들을 선택하고 이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실 ‘보통검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인 ‘보통’의 범주로 규정한 집단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회사원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보통’에 대한 대본을 낭독하는 퍼포머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이 희곡의 원작자인 보통 사람들이 이 연극의 배우이자 동시에 주요 관객이 되는 특별한 다원예술의 형식을 제안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온전한 저자성을 주장하기보다 설문에 답안을 제시한 관객들이나 협업자들과의 동등한 위계에서 진정한 공동작업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는 원 저자로서 참여한 관객들의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를 그대로 반영하여 텍스트화 시키고, 그로부터 파생된 2차 생산물의 결과물 또한 관객들이 제공한 원 소스에 예술가적 해석을 적용시켰을 뿐 아니라, 그 결과물들이 실제 전시장에서 또 다른 관객들의 생각들과 더해지도록 하여 이 모든 주체들의 목소리가 혼재된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아카이브와 픽션의 결합은 그의 예술 작업이 “사람들에게 받고 다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방식“을 표명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trans. Simon Pleasance & Fonza Wood, (Dijon: Les Presses du reel, 2002), p. 70

[2]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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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Theater_2018_8채널 보이스 드라마, 무대공간_가변크기


[6] 텅 빈 극장

경기도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박혜수의 이번 신작 <Voice Theater>(2018)와 <The Voice >(2018)는 작가가 6년 동안 진행해 온 ‘보통 프로젝트’를 갈무리 짓는 작업이다. <Voice Theater>(2018)의 경우, 전시장 내에 극장의 구조를 만들어 제시했지만, 궁극적으로 배우의 신체적 현존이 없이 배우들의 목소리와 환영들만 존재한다. 이 보이스 극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며 시작하는 희곡의 프롤로그와 1,000여 명의 표본 집단인 관객들이 제출한 설문조사 주관식 답안을 기초로 제작된 희곡의 1, 2장을 전문 배우 8명의 목소리로 연기한 것이다. 160석의 빈 의자들 사이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8채널의 스피커에서는 N(노멀)을 중심으로 중간, 일상, 눈치, 대중, 이상, 아무것도 아님, 평범, 평균과 같은 이름의 등장 인물들이 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보통’과 ‘정상’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인다. 등장인물들의 명패가 붙은 빈 의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이 실제 무대는 아카이브와 픽션을 결합한 특유의 서사 방식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몰입을 이끄는 것은 물론, 관객이 연기자가 되어 희곡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환경을 가능케 한다. 이 곳에 들어온 관객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익명의 목소리들을 신체적으로 감각하고 금새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된다. 관객들은 결국 이 공간에서 보통에 대한 논쟁에 스스럼없이 참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부지불식간 그 무대의 연기자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 이 가상적 공간에 들어 온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며, 이 연극의 객석이 아닌 무대 위 주인공으로 자리한다.

 

[7] 몸 전체

관객과 협상하는 형태를 만들어 관객 각자에게 참여할 기회를 남겨두는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작품의 구성 요소로서 관람자의 현존을 사유하는 현상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미니멀아트에서 그 창작의 원천을 취한다. 그러나 박혜수의 작업은 이러한 “망막적인 참여”- 마이클 프리드가“연극성”이라는 제목으로 고발했던 것-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다. 관람자가 작품에 기여하는 것은 “그의 몸 전체, 역사, 그리고 그의 태도이지 더 이상 추상적인 신체적 현존이 아니"[1]라는 것이다. 즉 미니멀아트의 상호 주체성을 기반으로 한 형식적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박혜수의 작업에 참여하는 관객들은 "감정적이고 행동주의적이며 역사적인 대답"[2]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과 작품과의 만남은 미니멀아트의 경우처럼 공간을 발생시키기보다, 시간의 축적을 발생시킨다.


[1] Ibid, p. 59.

[2] Ibid.

 

[8] 삶의 형태

박혜수의 작업에 자리잡은 대화의 속성은 공공성,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다른 차원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박혜수의 ‘보통’ 프로젝트는 누구나 특정한 공동체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나 보편적인 동시에 특이성을 생산하는 참여를 유도한다. 그것은 ‘보통’이라는 주제가 누구나 타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자, 관객 개개인으로부터 자신의 환경, 경험, 세계관에 비추어 각자 다른 이야기와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예술의 형태’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획일화된 공동체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참여가 아닌, 보편적인 감정의 공감을 유발하는 삶의 형태로서 개개인이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관시킬 수 있는 공유의 장을 창조한다. 그의 작업 앞에선 누구나 미술계 내에서 작용하는 그 어떤 지적 헤게모니나 일종의 미학적 편견이 무효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효과는 그 무엇보다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출몰하는 개개인의 삶과 기억, 꿈 등 진정한 자아,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만들고, 타자와 대화를 시작하게 만든다. 이처럼 누군가에겐 성벽 높은 화이트큐브 안에서 박혜수의 작업은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 관객 모두가 동등한 위치로부터 자신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며, 이는 곧바로 우리가 처한 사회적 상황,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질문으로 시선을 옮기게 만든다. 전시장에서 그가 제시하는 설문이나, 다이어그램, 낭독을 위한 무대, 텅 빈 객석은 단순한 관객 참여 그 이상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향한 발판이 되며, 각각의 개인이 그 삶에 동화되어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진정한 공공성은 통일성이나 일관성과는 전혀 무관한, 보편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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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ice>(2018)

 

[9] 다름

그의 작업에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플 라이프>(2005)는 500명의 일반인들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들의 이야기를 각본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중간 역인 ‘림보’에 머물며 생전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골라 이야기해주면, 림보의 직원들이 각자의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그들을 영원으로 인도한다는 내용이다. 다큐멘터리와 판타지 장르가 결합되어 기이한 감정을 만들어낸 이 영화는 연기자인지 일반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연의 당사자인 개인을 위한 일종의 맞춤형 영화를 제작해준다는 점에서 박혜수 작업의 형식적 특성들과 맞닿는다. 줄곧 자신의 작업에서 관찰자이자 분석가, 해석자로 자리매김하던 박혜수는 <보통의 정의>(2013-2018)를 마무리하며, 한 편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 작업을 제작했다. 1층 프로젝트룸에 전시된 <The Voice>(2018)는 <보통의 정의>에서 생산된 무수히 많은 의미와 이야기, 플롯들 가운데, 오롯이 작가 스스로 도출한 결론이자 독백이다. 그 내용은 <보통의 정의> 희곡 3장으로 쓰여졌고, 궁극적으로 작가는 이 독백을 농아 배우에게 수어 연기로 요청했다. 그 과정을 다큐적 혼합으로 재현한 이 영상은 남들과 ‘다름’을 곧 ‘보통이 아님’과 ‘정상이 아님’으로 치부하는 폐쇄적인 한국사회에서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보통’과 다르지 않음을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이들을 몸짓과 소리를 통해 과연 ‘보통의 의미’는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있다.

 

[10] 해방

박혜수의 작업은 특유의 관객 참여 장치들로 수집한 관측 데이터를 근거로 한국사회 다양한 공동체의 이면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거대한 아틀라스를 조직하고, 이를 성찰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다양한 형식적 실험들을 통해 10년 이상 지속해 온 이러한 그의 작업들은 참여자 개개인의 자발적 성찰을 이끌어내 첨예한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개인이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 상실된 것들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예술 실천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무엇이든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될 수 있어야 의미가 창조”된다는 펠릭스곤잘레스-토레스의 말처럼, 박혜수 작업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각 개인이 동화될 수 있는 보편성에 바탕을 두는 현존의 공간에서 얽히고설키는 다성성의 자유로운 연합에 의해 예측불가능하게 발생하게 됨으로써 그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의 기준을 고정된 것이 아닌, 각자의 행위에 의해 새롭게 생성될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바라볼 때, 모든 개개인은 주어진 정체성의 권역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특수한 경험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보통이나 정상의 범주란 각자 자신의 삶과 연관 지어 다른 의미로 규정될 수 있으며, 관객 개개인은 이러한 자기 구성적 행위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자신을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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