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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지난 여름 난지 작업실에서 오랜만에 작가를 만나러 갔던 날 엽서 한 장을 주었다. 겨울에 있을 개인전을 위해 모으는 중이라며 준 그 엽서에는 <Meet the Lost>라는 글씨 밑에 4개의 질문이 쓰여 있었다. 일종의 설문조사. 출근해서 업무용 전자결재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시시콜콜한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설문, 혹은 격무 부서 선정이니 하면서 정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는 ‘척’하는 설문, 또 조금 낯선 번호다 싶어 받으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잠시만 시간을 내어.... 어쩌고...”하는 설문조사를 당하는 일이 일상다반사라 질문을 받고 답하는 일은 얼마든지 빠르게, 기계적으로 해낼 수 있다. 스크롤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긴 설문조사와 달리 박혜수의 질문지에는 겨우 4개의 질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엽서를 받고 되돌려주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작가가 보내준 링크를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내주며 참여해보라고 권했다. “간단한 거야? 몇 문항이야?”라고 물었던 그들은 “응, 그냥 4문제.”라는 답에 “그래, 보내봐” 라고 선선히 답하다가도, 잠시 후 “미안.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다. 밤에 생각해보고 보내도 될까.”라는 답을 보내왔다. 
나 역시 그랬다. “당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가장 아쉬운 것(사람)은?”이라는 이 짧은 질문에 있는 ‘삶’, ‘잃어버리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들에 걸려, 한참 넋을 놓고 있었다. 번잡스런 낮 시간동안에는 도저히 답을 떠올릴 수 없을 것만 같았고 홀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시간들이 있어야할 것 같았다. 작가와 농담처럼 얘기했듯이 그 질문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넌 아직도 그런 걸 물어보니?‘ 라든가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라는 핀잔을 들을 법한 난감한 질문들. 
 
Sema의 신진작가 지원전으로 열린 <잠겨 있는 방>전에서 <Unasked Question, Unheard Answers>와 <시간창고>는 그 설문결과들을 재료로 한 작품들이다. 사람들에게 지난 생에서 가장 남기고 싶은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한 기억을 오직 하나만 고르게 하는 일본 영화 <Wonderful Life>(1998)에서 시작한 <Meet the Lost>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가장 아쉬운 것(사람)이 무엇입니까?”, “이것(사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사람)을 잃어버린 이유는?” “그 모습을 기억하나요?” 라는 네 개의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답을 하기까지 보내는 시간들, 또 답을 보낸 후의 시간들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 수거된 답변들이 재료가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엽서나 링크를 통해 그의 질문들을 맞닥트렸던 사람들이 잠시 ‘아, 이거 참.. ’하고 멈췄던 순간,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놓고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던 찰나, 그때 느꼈을 허한 기분들까지 작품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기계조작에 의한 신체적인 상호작용성이 아니라 관람객의 정신과 소통하는 상호작용성을 꿈꾸고, 관객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시키는 한편 작품을 통해 작가 자신이 관객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Meet the Lost의 질문들을 가장 처음 생각해보았을 이는 작가 자신일 것이고, 사람들이 써낸 답변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읽으면서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 사람도 작가 자신이다. 그 과정을 통해 첫 번째 관객인 작가 자신을 포함한 관객의 빡빡하고 잘 짜여진 일상에 틈을 내고, 바쁜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작업을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하는 그는 자신을 붙잡는 것- 영화나 책, 생활 속에서 마주친 문장, 이미지 혹은 그 어떤 것-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풀지 못한 질문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다큐멘터리영화처럼 시각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들로 현실의 단면을 폭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방식으로는 우리가 애써 눈을 돌리고, 마음속에 덮어두려고 하는 문제들을 좀 살펴보라고 권한다. 
 
융은 예술가란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좀더 명확히, 그리고 울림을 갖도록 형상화시키는 사람이라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이들이고, 따라서 예술가의 작품은 그와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대하여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융이 2008년을 살고 있다면, 그는 예술가를 어떤 사람들이라 말했을까. 색채와 형상이 점점 더 화려하고 자극적으로 변해가지만 작품과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예술에 대해 기대하는 것들도 점점 더 작아진다. 소설을 잃고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미술도 잠시 보고 잊어버리는 소비재와 같이 되어, 점점 더 많은 작품을 보는데도 가슴 속에 기억 속에 남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물론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더 분주하고 여백이라고는 없어서 작품들을 만날 여유가 없기도 하다.) 
 
박혜수는 “예술과 종교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작품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간의 깊이> <표면에서 느끼는 깊이>, <깊이에의 시간>, <시간의 숲> 과 같은 예전 개인전 제목이 보여주듯 그간의 주제가 ‘시간’으로 묶였다면, 이번 <잠겨 있는 방>에서는 시간이라는 주제가 추상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사람들 개개인의 구체적인 시간으로 좀더 또렷해진 것 같다. 
자신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세 장의 사진- 초등학교 입학식날 어머니와 찍은 사진, 누구나 한 장쯤 갖고 있을 법한 불국사 앞에서의 수학여행 단체 사진, 오랜 기간 살았던 유년시절의 집-을 투명아크릴판에 스크래치로 새기고, 그 위에 물을 담은 후 물방울을 떨어뜨려 일렁거리는 그림자로 벽에 사진을 투사한다.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이미지는 또렷해졌다가 다시 흐려지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의 기억과도 같은 형태일 것이다.
 
<잠겨있는 방>에서 기억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기억 속의 장면들을 보여주지만 이런 과정들은 과거로의 애잔한 향수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개인이 자신이 안고 있으면서도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 방치한 문제들에 좀더 집중하기를, 그리하여 지금,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집중하기를, 나아가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관객을 잠시 멈추게 할 수 밖에 없다. 릴케는 비활동적이도록 강요받는 바로 그런 나날들 속에 우리가 더 심오한 의미에서 생산적으로 되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살아 있는 동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런 시기에 작가가 가능한 어떤 형태로든 사적인 일상에 의해 자신의 건전지를 재충전하지 못한다면 그 작가에게는 점점 빛이 희미해진다고. 작가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박혜수의 작품을 자신 안에서, 또 작품을 보는 사람들 안에서 빛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한 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도종환, <귀가>) 
 
다시 그의 질문들을 생각해본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반성할 시간, 소중한 것을 남기고 쓰다듬을 시간도 없이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는가. 

 

 
2008. 11 <잠겨있는 방> 展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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