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 일이다. 갑자기 봉쇄령이 내려지자 준비하던 전시와 강연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1년 뒤 봉쇄령이 풀렸지만, 여전히 작가들과 미술관은 관객 프로그램에 주저하고 있었다. 갇혀있는 동안 가장 큰 답답함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관계의 소중함'을 절감한 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우리에겐 어떤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지' 얘기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어렵게 마련한 강연… 나는 관객 노쇼를 걱정했지만, 30여 명의 관객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지, 나만 사람이 그리운 게 아니지..' 그 어느 강연보다 관객과 나는 그 순간을 만끽했고, 모두가 반가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Q&A 시간 때, 중년의 한 관객이 던진 질문이 아직까지 머리에 남아 있다.
"저는 오늘 여기서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고 좋은데, 우리는 왜 외로울까요?"
물론 나는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한국은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건만, 내 주변엔 외로움과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그들 곁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주인공 황동만은 10년째 데뷔조차 못 하는, 소위 못 나가는 영화감독이다. 친구들은 그를 창피해하고, 그는 그들에게 존재감을 인지시키고 불안은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지껄인다.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혼자인 동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그들을 피하지 않았다. 비호감에 가까운, 수다스럽고 불편한 모습이었지만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를 싫어하는 지인들이 불만을 쏟아내고 이를 안타까워한 친구가 그를 억누르려 하자 자신을 비난한 성공한 그들에게 따지라 한다.
"나 싫어하는 놈들에게 왜 내가 잘해야 하는데?"
하긴 동만은 조금은 부끄러울 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 놈이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수년 전 그 관객에게 하지 못한 답을 찾은 듯했다.
동만은 '보여지는 나'와 '실제의 나'의 간극이 거의 없다. 약점인 불안조차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감추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위해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와 태도, 실력을 만들어 간다. 나답지 않은 일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남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인기인이 되어 주변에 사람이 많아져도, 우리는 왜 여전히 외로운 걸까? 그건 내면에 감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를 진짜 '나'인 줄 착각하게 되면, 진짜 '나'는 사라지길 바라며 외면하기 쉽다. 그렇게 내게서 외면받은 '나'는 외로움 속에 홀로 남겨진다.
결국 이 알 수 없는 외로움은 내가 외면해 온 ‘본래의 나’가 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 자신감 있고 예의바른 나도 '나'지만, 성급하고 인내심 적고, 욱하는 나도 '나'인데, 후자는 늘 감추고 억누르며 창피해하는, 황동만 같은 찌질한 아이로 취급한다. 그렇게 상처받은 자아가 삐딱하게 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아이를 외면하지 말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바라봐 주면 어떨까? 자신에게 작은 호의를 보이는 누군가에게 이 아이는 자신의 전부라도 내어줄 것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답해 줄 것이다. 우리 외로움의 해결은 내 안에 외면하고 있는 ‘나’를, 내가 보살피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원문)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60616580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