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작가 루쉰의 <고향>엔 이런 구절이 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수많은 작품과 작가를 만나고, 전시를 치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전시장에서 '눈물'지을 만큼 감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음악과 영화와 달리 미술에선 내 작품을 포함한 그 어느 작가의 작품에서 눈물지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미술작품에선 감동을 기대하지 않는 둣하다.
 
감동와 희망을 뒤로하고 내가 미술에서 기대하는 건 대체 뭐였을까.
다소 미술 세계에 회의감이 들 지난 겨울 새로 개관한 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았다.  당시 진행하던 프로젝트와 개인전을 앞두고 맘도 몸도 바쁘던 터에 이곳을 찾은 건 오직 한 작가 때문이다. 
 
리밍웨이.. Lee Mingwei 
내가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은 작가다. 10여년전 쯤에 호암미술관의 'Mind Space' 전에서 처음 작품을 본 이후로 완전히 그의 팬이 돼버렸다. 그의 신작 Sonic Blossom이 서울관에서 발표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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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Lee Mingwei 홈페이지>
 
이 작품은 그가 병드신 어머니를 돌보다 문득 듣게된 슈베르트의 가곡이 자신에게 줬던 평안과 위안을 관객에게 전하는 작품이다. 
 전시장에선 그가 고용한 한국의 성악가들이 지나가는 관객중 한 명을 앞에 앉히고 그녀만을 위한 노래를 불러준다. 
개인적으로 클래식 연주도 자주 접하긴 하지만 미술관에서 듣는 성악곡은 그 어떤 연주장에서 듣던 곡보다 아름다웠다. 수 많은 관중속에 섞여 미술관을 울리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들으면서 전시장에선 한번도 흘려본 적없는 눈물을 흘렸던 건 아마도 2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었으리라.  

나 역시 투병중이셨던 아버지의 간호를 담당했던 터라 병든 아버지의 등 뒤에서 여러 날을 고단함과 절망 속에 보냈어야 했다.
긴 병엔 장사가 없듯이 투병이 길어질 수록 돌보는 가족이 느끼는 심리적인 고통은 환자의 육체적 고통못지 않다.  사람들은 희망을 놓치말라 위로하지만 나빠지기만 하는 현실앞에선 그 어떤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여전히 아픈 아버지를 보는 건  '내일은 나아지겠지'란 어제의 기도가 소용없는 하소연일 뿐이란 걸 깨닫게 했다. 그런 좌절감은  뭘해도 소용없는 청춘을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아버지가 고통없이 하루를 보낸 화창한 어느 운 좋은 날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밝아보이고, 나아보이고,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은 몇 안되는 화창한 하루.... 
그때 입원실밖으로 보였던 혜화동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 아름답다'란 감정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음악이냐, 미술이냐는 논란을 접어두고 아픈 부모를 돌보는 자식이 그 고단함과 절망감에 위로와 아름다움을 느꼈던 찰라의 순간을 말하는 듯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모든 게 달콤한 운좋은 날...

 

그리고 자연스럽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걸어도>가 떠올리게 한다.
이 역시 고레에다 감독이 어머니의 죽음 전후의 삶을 담담하게 그린 영화다. 영화는 그의 다른 작품처럼 큰 요동치는 일 없이 잔잔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그 평범한 날들이 언젠가는 뼈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질 것을 알았기에 영화 내내 통곡을 하며 봤던 것 같다. 
얼마전 그의 신작이 작년에 국내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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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병원의 실수로 아이가 바뀐 실화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진행은 우리와 다름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의 연속이다.
참 묘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다. 특별한 사건, 전개도 없이 물흐르듯이 흘러가는 전계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란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반가운 점이라면 예전에 그의 영화를 보러가면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엔 꽤 큰 극장에 사람들도 만원이다. 그것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그의 모든 작품을 봐왔던 나는 그의 영화가 감독의 고백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도 같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old해졌단 의미가 아니다.
예술가가 자신이 나이듦에 따라 변하는 욱체적, 감성적 변화를 작품에 반영하며 다양성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평범한 일상에 나와 다르지 않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주요 인물인 그의 작품들은 정해놓은 구성이나 특별한 사건이 없이도 그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하는 시선과 생각의 깊이를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세워도 내일은 어떤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이다. 나보다 10년정도 나이많은 작가가 보여준 일상은 나또한 가게 될 내일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내겐 삶을 살아가는 많은 준비를 하게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주변을 꾸미지 않고 말하는 작가들.. 
두 작가의 작품에선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을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꽤 오랫동안 삶에서 희망을 찾게했다.
'보통의 정의'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보통에서 '희망은 고려하지 않는다' 답을 내놓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은 보통이 아닌 특별한 하루인 것이다. 2년전 정말 운좋게 고통없이 잠에서 깬 아버지를 보는 날처럼 말이다. 
하지만 루쉰의 말대로 희망이란 반복해서 노력하면 생기는 것이라면 아직은 포기하고 싶진 않다. 
두 작가의 특별한 것 없는 하루들이 내게 희망을 갖게한 것 처럼 솔직한 고백같은 작품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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