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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고충환(미술평론)

박혜수는 전작에서 자연미술 또는 생태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일련의 작업들에 천착해왔다. 은행잎, 쑥, 벚꽃나무, 산수유, 계수나무, 단풍나무, 플라타너스, 황매화의 나뭇잎과 꽃잎을 채집하고, 말리고, 이를 고운 가루로 빻은 후 그 가루를 이용하여 여러 형식의 조형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가루는 일정한 크기로 구획된 공간 속에 흩뿌려져 설치되는가 하면, 접착제와 결합하여 정형의 조형물로 빚어지기도 하고,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일종의 퇴적층으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자연의 생리를 체득하며, 자연의 시간을 체감하는 과정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때론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만 일년 이상의 과정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작품은 인간의 질서와는 다른 자연의 질서를 드러내 보이며,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자연의 시간을 추체험하게 한다. 작가가 자연 속에 들어가서 자연을 채집하며 자연의 시간을 공유한 이 작업은 그대로 존재의 근원을,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는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과정에 접맥돼 있다.

박혜수의 작업들에서 자연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시간으로 나타난다. 생성하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현재진행형의 순환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자연의 시간은 그대로 인간의 시간, 삶의 시간과도 통한다. 바로 시간의 이러한 개념이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작가는 시간의 개념으로써 자연의 원리에다 구체적인 실체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는 각각 깊이에의 시간(자연의 시간)과 관계의 시간(인간의 시간)이라는 소주제로 나타난다.
박혜수의 작업들에서 자연의 원리는 무엇보다도 시간으로 나타난다. 생성하고 변화하며 소멸하는 현재진행형의 순환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자연의 시간은 그대로 인간의 시간, 삶의 시간과도 통한다. 바로 시간의 이러한 개념이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단지 타자의 개입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 실체를 갖는 의타적 개념이다. 시간은 그 속에 지속적인 변화를 함축하고 있는 감각적 실체를 통해서 드러나며, 그리고 공간은 무(빔, 공)의 상태를 채우고 있는 감각적 실체를 통해서 우회적으로만 지각될 뿐이다. 이는 마치 서늘한 기운이나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서 바람의 실체를 지각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런가하면 모든 감각적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이야말로 감각적 실체를 성립시키는 조건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감각적 존재와의 관계는 서로를 규정하고 정의하는 상호 조건적 관계인 셈이다. 세상은 이처럼 타자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존재를 세울 수 있는 의타적 존재들로서 구조화돼 있다.

이처럼 의타적 관계로 구조화된 세계 속에서 시간은 운동, 속도, 지속, 생성, 변화, 변형, 소멸, 부패, 영원, 순환, 회귀, 윤회, 길이, 축적, 기억, 환기, 회상, 암시, 예감, 예견, 근원, 역사, 전망, 세기, 찰라, 계승, 발전, 연속, 단절, 흔적, 전조, 노정, 과정, 여로,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허다한 계기들로서 나타난다. 시간의 이러한 계기들은 그대로 박혜수의 작업 속에 배어들어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시간에다가 실체를 부여하고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는가. 이에 대해 박혜수의 근작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돋보기를 이용하여 나무의 나이테를 따라 그리는 식의 드로잉 작업으로써 자연의 시간을 기록한다. 그리고 햇볕을 쫓아 자연 속에서 보낸 1년 가량의 소요 시간과 과정을 기록한 사진설치작업을 보여준다. 이는 실타래가 감기고 풀리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여주는 영상설치작업과 함께 시간의 깊이(깊이에의 시간, 자연의 시간)를 체험하게 한다. 그리고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여 저마다 다른, 차이나는 시간 개념을 체험케 한 실 설치작업에서 작가는 시간을 매개로 한 타자와의 관계(관계의 시간, 인간의 시간)를 주지시킨다.

먼저, 돋보기 작품을 보면, 작가는 횡단면으로 자른 나무둥치의 나이테의 문양을 따라 돋보기로 선을 그린다. 산발적인 햇빛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용을 하는 돋보기에 의한 이 그림은 실상 햇빛이 그린 그림이며, 여기서 작가는 단지 조력자이거나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이 자기의 존재 원리를 잘 드러내 보이도록 돕는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자연이 자기 속에 완전한 형상을 숨기고 있다고 보는 자연관과도 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몫은 그 형상이 자기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고 명료하게 하는 개념화의 과정에 맞춰져 있다. 더불어 이 작업을 위해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작가의 신체의 움직임을 맞춰야 하는데, 이때 나이테로 그려진 드로잉의 길이는 그대로 태양의 길이에 일치한다. 이렇듯 태양의 움직임에 따르는 작가의 신체의 행위가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과정인 셈이다. 이는 그대로 결과와 함께 과정이 강조되는 프로세스 아트의 일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과정은 또한 인간의 생체리듬이 자연의 생태리듬에 연유한 것임을 주지시킨다. 더불어 태양의 움직임을 쫓는 작가의 행위는 자기의 존재가 유래한 원형(근원)을 쫓는 행위와 동일시될 수 있고, 따라서 일종의 신화적 메타포마저 저변에 깔려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진설치작업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시간 순으로 배열된 사진에는 자연스레 계절의 변화가 담겨져 있고, 그 자체 일종의 색 띠의 조형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자연과 더불어 작가가 보낸 시간의 기록이란 점에서는 일종의 사사로운 일기나 일지의 성격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최초 감겨진 실을 풀어내는 과정을 비디오로 녹화하고, 이를 거꾸로 반복 재생시킨 영상작업은 일종의 시간의 관성을 보여준다. 작은 점에서 큰 점으로, 그리고 재차 큰 점에서 작은 점으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업에서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불가역적인 시간이 물리적이고 직선적인 시간개념을 암시한다면, 그 계기를 반복 재생시키고 있는 시간이 원초적이고 순환적인 시간 개념을 암시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계기(삶의 계기)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궤도운동을 되풀이할 뿐인 원초적 시간 속에 편입되고, 시간 이전의 시간 속에 해체되고, 마침내는 희미한 잔영을 남기며 화면 속에서 사라진다. 시간의 깊이와의 대면은 이처럼 언제나 덧없음을 되돌려준다.

박혜수는 이런 원초적인 시간에다가 관계의 시간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관계의 시간이란 시간에 대한 개인의 인식을 말하며, 그 관계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유할 수 없는 개별적인 형태를 띤다. 감겨진 실타래로부터 풀어낸 느슨하거나 팽팽하게 당겨진 실들은 서로 다른 타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 개념을 암시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저마다의 차이나는 시간 개념을 추체험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투명한 유리판 표면에 라인 테이프를 이용하여 마치 나이테와도 같은 드로잉을 그려 넣고, 이 판들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 중첩시킨 오브제 작업에서는 시간의 깊이를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시간의 계기들을 채집하고 기록하는 박혜수의 행위는 자기 반성적이다. 작가는 이미 시간의 계기들 속에 있으며, 시간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는 곧 자기의 존재를 기록하는 행위이며, 시간의 깊이가 되돌려주는 존재의 덧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존재의 현실인식을 자각시켜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작도 끝도 없는, 계측할 수도 계량할 수도 없는 시간의 미궁 속에 존재를 빠트리기도 한다. 그 미궁 속의 실오라기를 붙잡고 어둠을 더듬어 길을 찾는 일, 그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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