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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 작가론 : 치유   처방   응답으로서의 예술- 권영진(미술사)
 
보이는 것의 이면
 
박혜수의 작업은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당신이 보는 것(What you see is what you see)”이라는 형식주의 미학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박혜수가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원을 졸업하던 20세기의 마지막 십여 년은 20세기 후반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형식주의 미학이 종말을 고하고 미술을 비롯한 여러 예술 분야의 탈장르와 해체, 구조적 재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다. 변화에 민감한 창작의 현장보다 한발 늦게 발전하고 두어 발 늦게 제도적 보완점을 강구하게 마련인 아카데미 미술교육의 현실을 감안할 때, 박혜수가 속한 세대만큼 예술창작의 과제 앞에서 난감했던 세대도 없었을 것이다. 
검정색 줄무늬 회화로 미국 미술계의 일약 스타로 부상할 때 약관의 신진화가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가 타파한 것은 회화의 표면 위에 과도하게 부과된 회화 외적인 요소들, 기표를 신화화하는 기의의 아우라였다. 회화의 형식적 본질을 직시한 그의 지적이 오랫동안 관행화된 회화표면의 금기를 냉정하게 날려버린 것이라면, 그로부터 반 세기 뒤 박혜수는 다시 보이는 것의 이면을 이야기한다. 스텔라의 선언이 형식주의 미술의 좁고 긴 터널 끝에서 궁극적으로 자폐의 벽을 확인하는 방점이었다면, 이후 후배 예술가들의 갈 길은 자명해진다. 되돌아 나오거나 주변의 벽을 허무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1997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2000년 대학원을 졸업하는 과정에 박혜수는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돌이켜보고 작업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한편에서 미술의 종말이 선언되고 밀레니엄의 전환이 있을 무렵 박혜수는 서울 근교 숲속 작업실에서 자연의 색을 담기 위해 1년에 걸쳐 나뭇잎과 꽃잎을 채집하거나, 나무 등걸의 나이테를 햇빛 아래에서 돋보기로 태우는 태양 드로잉을 하며, 자연의 긴 호흡을 몸으로 체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학교나 미술제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창작의 해법을 입산의 과정으로 얻은 것이나,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작업과 대면하는 과정이 사회로부터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된 자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의미심장하다. 기존 사회의 틀 어디에서도 쉽게 해답을 얻지 못하던 박혜수가 느린 자연의 속도에 삶의 속도를 맞추며 새로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과정은 작가로서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친 것이라는 박윤정 큐레이터의 평가에 동의한다. 
 
자연과 박혜수, 사람들과 기계
 
세상으로 돌아온 박혜수가 주목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삶의 의미, 존재의 근원에 관한 것이었다. 박혜수는 미술은 보이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품을 통해 표면 뒤의 깊이를 보고자하며, 삶과 예술, 종교가 일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우라고 말한다. 
2000년과 2001년의 개인전이 다분히 자연친화적인 대지미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숲에서 지낸 2~3년간의 공백 끝에 다시 돌아온 박혜수의 작업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자연의 긴 호흡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된 박혜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신 있게 세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되돌아왔다. 2004년 개인전에는 모터 장치와 시계 무브먼트, 턴테이블, 카메라와 영상 장비 등이 꽃잎과 나뭇잎의 자리를 대체했다. 숲속에서 자연과 맨몸으로 대적했던 작가는 인간의 숲인 세상에서는 문명의 이기인 기계 장치들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과 생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상적인 나날의 반복, 무수히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서로가 맺는 관계의 의미를 묻기 시작했는데, 무의미하게 또는 무심하게,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이 기계장치의 길고 짧은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재현되었다. 박혜수는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표면 뒤의 깊이, 겉모습 뒤의 내면, 형식 뒤의 내용이 새롭게 각인되기를 원한다. 모든 사람이 보이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삶에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일상에 묻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모두 알고 있으나 말하지 않는 것, 아니면 모두가 궁금해 하면서도 결코 진지하게 되묻지 못하는 것에 주목한다. 
 
자신의 모습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자연 속에 혼자 있기를 택했다면,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 박혜수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기계장치와 간단한 수동 장치, 지금은 구하기 힘든 구식 타자기 등이다. 기계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오늘도 시계바늘처럼 제자리 돌기를 반복하는 우리의 삶을 시각화하여 보여준다. 길고 더딘 또는 짧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을 은유하는 박혜수의 작업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움직임의 시간, 떨림의 소리, 감성의 향취
 
형식 뒤의 내용, 시각적인 것 뒤의 정신적인 것, 보이는 것 뒤의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박혜수의 작업이 미술의 전통적인 형식언어인 ‘시각’의 요소를 벗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작업은 공간 예술인 미술의 영역에 긴 시간의 흐름을 도입하고, 고정된 조형성 위에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움직임의 요소를 개입시킨다. 그의 작업은 움직임의 시간, 떨림의 소리, 감성의 향취로 관람객의 주변을 맴돈다.   
2007년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머물렀던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스튜디오 디아트(Studio DiART)에서 박혜수는 그곳의 가장 인상적인 풍경인 에리체 산이 내다보이는 스튜디오의 창에 열린 창의 형태를 덧그렸다. 친숙한 일상이 되어버려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곳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자연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새롭게 각인시키는 박혜수의 간단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제안이었다. 측면의 창에는 그곳 성당의 창문장식을 옮겨 그려 저녁 무렵이면 한 시간 가량 기울어진 태양빛이 맞은편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름다운 성삼위일체를 구현하도록 했다. 
 
스튜디오 디아트의 디렉터인 돈 리볼리오(Don Libolio) 신부는 박혜수의 작업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의미 없게 보이는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지적했다. 박혜수의 작업은 자연 소재를 사용했건, 기계장비를 사용했건,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정한 형태와 물리적 요소로 가시화하여 드러낸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은 시각적 체험이 아닌 소리, 향취, 빛 등 비가시적인 요소일 수도 있고 마음, 감정, 느낌, 기억, 죄의식과 같은 정신적인 영역이 될 수도 있다. 삶과 예술에 있어서 박혜수가 주목하는 것은 다분히 종교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작업은 일상 뒤의 초월적인 세계 또는 감성과 인지의 추상적인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기억을 환기시키고 내면의 감성을 돌이켜 보게 하는 박혜수의 작업은 전시장 안에 울려 퍼지는 타자기 소리, 기억 속에서 이탈해가는 분쇄기 소리, 가까이 가면 멀어지는 인기척, 촉각으로 인지하는 진동, 여러 감성과 심리상태를 대변하는 향취로 환기되었다.  
 
마음으로 나누는 대화, 진정으로 전하는 답변
 
2009년 박혜수의 작업은 한 번 더 달라져 있었다. 소마미술관에서 <대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신작은 서울시내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채집하여 녹취한 것이었다. 작가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글로 옮겨 적은 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보내 조언과 처방을 구하거나 나름대로 대화를 이어가도록 요청했다. 전시장에는 여러 달 동안 서울 시내 곳곳을 다니면서 작가가 채집한 대화의 내용이 기록의 형식으로 전시되었고, 여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답변과 처방이 기록과 부적, 음악, 향수, 소견서 등의 형태로 배열되었다. 
작가가 채집한 대화의 내용은 누구라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고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서로가 주고받는 말들이다. 커피숍의 옆 테이블에서, 전철안의 휴대폰 통화에서 누구든 쉽게 들을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듣는 내용들을 작가는 오랫동안 채집하고 그중 결정적인 부분을 발췌하여 공들여 문자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사람들은 왜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였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나름대로 의견을 주고 받지만 정작은 핵심을 바로 보지 못하고 동문서답처럼 겉도는 일상의 대화를 남발하는 우리에게 박혜수는 잠시라도 자신을, 상대를 진지하게 바라볼 것을 권한다. 
 
작가가 인상 깊게 보았다고 소개하는 일본 영화 <원더풀라이프>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지대 림보에서의 일주일을 그리고 있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기 전 망자들은 일주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이승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하나를 고르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 기억만을 가지고 저승으로 갈 수 있기에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주의와 함께. 림보에서도 일본인들은 이승의 샐러리맨처럼 정시에 출근하고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그 가운데 떨어진 ‘삶의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이라는 과제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순식간에 이탈하는 영원에 대한 질문이자 대화인 셈이다. 
 
선택 사양에 따라 죽음을 준비하라는 상조광고가 여러 생활용품 광고들과 번갈아 등장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듯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일본인 감독의 제안은 너무 친숙하기에 충격적이다. 그리고 ‘언제 이사 오셨어요’라고 묻듯이 ‘언제 돌아가셨어요’라고 묻고 뒤이어 그 삶을 한 순간으로 압축할 것을 요구 받는다.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나날이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갈등하는가? 박혜수가 영화 <원더풀라이프>를 닮은 대화채집과 설문, 응답의 형태로 묻고 있는 것은 이러한 지점이다. 
 
그대를 위한 대답, 나를 위한 처방 
 
신작 <대화>에서 박혜수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빌어, 버스 뒷좌석에서 주고받는 사람들의 대화, 유명 호텔 커피숍에서 맞선보는 남녀가 주고받는 대화가 너무나도 통속적이고 일상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기에 상대를 배려하는 척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때에 따라서는 선문답처럼, 동문서답처럼, 답변 아닌 답변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찰이, 그들을 위한 질문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과정을 반추한다.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순간의 진실함과 절박함을 놓치고 있다. 죽어서 평범하게 삶에 대해 이야기 하듯, 살아서 나누는 평범한 대화가 삶을 넘어선 지점을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진지할 수 있다면 진정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순간은 의미 있는 철학적 깨달음, 내밀한 종교적 각성, 명징한 정서적 순화의 순간이 될 것이다.  
 
미술의 경계가 깨지고 자폐적인 틀이 해체된 지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박혜수는 여전히 창작의 과제를 안고 가는 사람으로, 삶과 예술, 예술과 종교의 문제가 접목되는 지점에서 창작의 발판을 찾고 있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짐짓 진지한 의견을 나누지만 사회의 통념과 일상의 반복 속에서 정작 소중한 것 본질적인 것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짐짓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가는 자신의 삶을, 서로의 존재를,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것을 촉구한다. 
 
미술과 여타 장르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 그 엄밀한 형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뒤, 우리 시대의 예술이 갈 길은 치유와 처방, 응답으로서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여러 계파와 종파로 구분되는 현실적 종교가 제시하지 못하는 정신적 치유와 과학적 심리 상담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내면의 처방, 상대에 대한 진지한 공감과 진정어린 응답이 우리시대 예술가 박혜수가 작업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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