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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Dialogue

-박윤정 SOMA Drawing Center 책임 큐레이터

  

박혜수의 이번 개인전은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벽이 느껴지는 관계 혹은 그에 관한 고백과 대화들로 채워져 있다. 엿들은 이야기, 작가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 묻지 않는 질문, 듣지 못한 대답, 음악으로 대신하는 심상, 타자기를 통해 현장에서 답변되는 관객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실 안은 수많은 자아(ego)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엿들은 대화
타인의 대화를 엿듣고 마치 연극 대사를 읊조리듯 써내려간 그의 대화집은 각양각색 50인의 축약된 인생사이다. 지난 3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서울시내 공공장소에서 작가가 무작위로 채집한 사람들로부터 엿들은 대화를 담은 「Dialogue」프로젝트가 본 전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작가는 대화집을 통해 고백한다. ‘그들의 대화는 때론 미처 알지 못하던 인생의 의미를 들려주기도 했고, 내가 전혀 알고 싶지 않던, 부정하던 세계가 사실임을 말해주기도 했다.’ 작가는 대화집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있었고 원치 않게 성장하고 있었고 이제 그 경험을 우리에게 얘기해주고 싶어 한다. 당장은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아질 것들을 알아가는 작가의 질문은 대화집 36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왜 사람들은 진지한 이야기를 싫어할까?’로 끝을 맺고 있다. 뭔가가 명치 끝에 걸려있는 기분. 박혜수의 대화집을 읽는 내내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답변
작가는 대화기록을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100인에게 보내, 50개의 채집된 대화 중 하나를 선택해서 대화를 이어가거나 대화집을 모두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서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직업적인 기술과 인생의 연륜으로 대화에 참여해 주기를 부탁했고 그 결과물 중 일부를 확대하여 액자상태로 전시실 벽에 연출하였다. 관객은 태양으로 담뱃불을 붙일 수 없는 게 태양의 잘못이 아니라는 소설가 이외수의 인용구에 한결 마음이 놓아지기도 할 것이고, 여성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가정을 만들지 못한 죄가 그녀의 원죄라는 냉소와 자조 섞인 여성운동가의 말에 불끈 하기도 하면서,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인생상담과 같은 혹은 처방전과도 같은 답변 혹은 진술서를 읽다가 공감하다 못해 작가에게 부채를 쥐어주고 점을 봐달라고 하고 싶을 지경이 될 것이다. 그때 전시실에 놓여있는 타자기에 손을 올려 자기 진술을 해보는 것으로 본 전시의 순례가 끝나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대화에 목말라있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 이 전시의 배후에 깔린 복선이 아닐까.
 
텍스트 무덤과 무도곡
가끔은 부질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앞에두고 허공에 시선을 꽂은 채 읊조리듯 얘기하고 있는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데 벽을 세운 마음이 시선을 주지 못하는 경험. 분쇄기를 거쳐 조각난 텍스트의 무덤은 그야 말로 묻지도 않은 질문에 시름 없이 흩어져 버린 답들을 한편으로 은유하고 있다. 또 한편 '거짓이라 하기엔 너무나 진짜같은' 이야기-이른바 생생 뒷담화-에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판국을 무덤으로 던져놓은 작가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잘려진 텍스트가 진실이었든 거짓이었든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리라. 전시실 창 너머에는 의자를 겸한 설치물이 놓여있다. 3미터에 이르는 봉 위에 확성기와 풍향계가 달려있고, 대화집 50번의 소외된 할아버지에게 방송인 황인용씨가 추천한 음악, 하차투리안의 <칼의 춤>, 김연아 곡으로 알려진 생상의 <죽음의 무도>가 울려퍼진다. 대화에서 연상되는 레퀴엠 대신 외로운 노후를 위로한 힘참 무도곡. 
 
시작
박혜수의 작업실에는 높이 15센티에 폭 45센티 정도 되는 잘려진 통나무가 있다. 작가가 1998년 부터 2년에 걸쳐 한 장소에서 돋보기로 태양열을 모아 나이테를 따라 태운 작품으로, 작가의 홈페이지를 통해 처음 접한 이 작품을 그의 작업실에서 본 순간 초심에 대한 진중함이 전해져 이 사람의 깊이와 앞으로의 행보가 긍정적인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의 포트폴리오를 돌아다보면, 돌, 나무, 꽃가루,식물 등 객관화된 사물과의 대화가 다채널적인 사람과의 대화로 옮겨가고 하나의 사물에 집중하던 그가 주명을 보게 되면서 그 큰 질량과 무게를 알아버리게 되고, 비로서 작가로서의 통찰력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흡사 완결을 향한 습작 드로잉을 보는 듯하다. 옹골치다 싶을 만큼 빈틈없어 보이는 작가의 고집스러움이 마치 통과의례와 같은 태양열 드로잉을 생각게 했을 것이며, 그 고집스러움 덕분에 흘려들을 법한 남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 여기 한  사람의 진정한 작가로서 인생을 살아갈 자격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찰나 과거가 되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시선이 이미 시간의 궤적을 뒤로 남기며 과거가 괴어 있는바, 그 안에서 남은 것은 떠도는 말들 혹은 각자의 머릿속에 기억의 음화와 양화로 남아 있는 이미지들일 것이다. 그 이미지들이 말과 괴리되어 전혀 다른 말로 와전되어 결국 허튼 이미지와 결탁하는 일이 이 세상에 비일비재한대, 이 속에서 어떻게 옥석을 가릴 수 있을것인가. 
판단을 유보한 채 있는 말 그대로를 전해준다 한 들 듣고싶은 말만 듣고 맘껏 해석해버리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상에 진실은 통하는 법이라 자조하고 마는 것이 바보같은 일인지..
새삼스럽게 작가가 알아버린 것이 바로 이것일까. 
 
 
                                                                                                                                    2009. 5 전시 서문 
 
사진 왼쪽> 벽 이야기 
사진 오른쪽> 아버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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