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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은 2010년 고양창작스튜디오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창작의 이유'란 주제 아래 입주작가와 작가가 선택한 Adviser 가 관련 주제와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도였습니다.

 

창작의 이유

 

작가: 박혜수 + Adviser: 엄정식 (철학가)

 

박헤수 (이하 박) : 제게 있어 작업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 보단 먼저 제가 세상을 알아나가는 통로의 역할이 더 큽니다. 작업을 시작하게 했던 것도 저를 둘러싼 세계를 제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근 10여년간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사회나 질서를 따라 살아왔지만 정작 대학원을 졸업할 땐 즘엔 깨달은 것도, 무엇을 해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끝은 아무것도 없었다.’란 현실에 당황했고 무력했으며 한참을 힘들게 헤맸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시간대로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질서나 사회를 떠나 저 스스로 터득하고 느끼는 것들로 ‘나’를 느껴보고 싶었고 그렇게 세계(世界)를 알아나가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인생은 제 작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예술에서 추구하는 것

 

저는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부분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작업들은 항상 저를 바꿨던 작업들입니다. 물론 예술 작품들은 그저 제 안의 문제를 건드려만 줬을 뿐 시각과 삶을 바꾼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바꾸고 싶기 보단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을 하게하는 작업들을 하고 싶습니다. 좀 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고 수용되어 지는 사회가 된다면 '오늘보다 낳은 내일‘을 꿈꿔도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수잔 손탁이 말한 것처럼 모든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사람들이 잘 보고, 듣고, 잘 느끼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감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진보하는 기술이 하지 못하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예술이 추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혜수: 분명히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지켜져야 하는 일이 저는 정신적인 일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람들의 모든 잣대는 순수할 영역 까지도 물질적 잣대를 가지고 판단되어 다수가 믿는 것이 '진실'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정신'이란 영역도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또 거래가 되어간다는 생각에 솔직히 미래에 대해 희망보단 염려가 앞섭니다.

예술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정신적 가치를 저는 작가의 내면에서 나오는‘ 순수의 회복’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러기엔 삶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유혹이 많은 시대와 환경에서 정신적인 가치(순수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는지 철학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엄정식(이하 엄): 어느 시대에나 휴머니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여다봤을 땐 내용이 다릅니다.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나?’가 다른 것이죠. 형식적로 보자면 인간을 지키고, 인간의 본성을 찾고, 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순수함을 지킨다는 건데 시대마다 부르짖는 내용은 형식에 비해 달랐습니다. 중세에는 (계몽주의자들이) 교회의 권위나 성직자들의 횡포로부터 지키고자 했고, 고대 그리스에선 (소크라테스가) 무질서와 혼란, 난잡함으로부터 인간의 본성을 지키고자 했으며, 로마 땐 제국의 체제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날은 기계 기술문명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데 이처럼 내용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가령 휴머니즘은 '순수주의‘라고 이름을 바꿔보고 생각해봅시다. 중세 때의 ‘순수주의’는 지금의 ‘순수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만 했죠.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순수를 지키자.’고 외치는데, 일단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어떤 점이 우리가 취약한지.’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분명히 과거의 예술에선 종교나 철학처럼 사회나 개인 스스로를 지키고 경계하는 역할을 부분이나마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발전하고 물질주의가 시대 철학이 되면서 예술 특히 미술은 사치품으로 인식되고 이용당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중들은 미술을 어려워하면서 무관심해지고 결국은 일부 계층만을 위한 특권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이 거리감이 커지면서 특히 어렵게 ‘순수성’을 지키며나가는 작가들의 작품은 화려하고 보기 좋은 작품들에 비해 대중에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누구를 위한 예술인지,’ ‘결국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게 아닌지.’란 회의감이 듭니다.

 

엄: ‘최초의 예술가는 누구였는가.‘를 상상해보면, 분명 원시시대의 동굴벽화의 수렵이나 주술을 목적으로 그린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역시 시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겠어요. 사냥하다 다리를 다친 이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더 이상 사냥도 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할 어떤 통로가 필요 했을 테고, 자신의 카타르시스(정화작용)나 자기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면 분명 최초의 그림은 수렵화가 아닌 추상화였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론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 이 사냥하다 다친 낙오된 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어떻게 표현하고, 확인하고, 과시하고, 다른 이들 못지않게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갈등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굉장히 영웅적인 모습, 그 어떤 맹수보다 사납게 나타냄으로써 사람들이 봤을 때 놀라움을 표시하거나 영웅시하고 찬양하는 것에서 스스로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요. 예술에 대해 전혀 다른 모티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예술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그게 사회주의 국가든, 로마 제국이든, 고대 아테네든지 모든 사회에선 이 두 가지가 모두 작용됩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만을 강조해서 그것만을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80년대 중반 서울과 평양의 평양 예술단과 서울 예술단의 공연이었는데, 두 공연은 매우 극과 극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평론가는 북한 예술단 공연에 대해 ‘세련된 학예회’같다는 혹평을 했지만 만약 내가 북한의 평론가였다면 ‘서울 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이게 무슨 예술이냐.’ 하지 않겠어요.

조금 깊이 생각하면 다른 나라(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문화에 대해 자신만의 시각을 고집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고려한다면 (동시에 볼 수 있다면) 좀 더 포괄적이고 지혜로운 예술관을 가지게 될 테고, ‘순수’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예술의 기원이 그런 것이라면, 완전히 어느 하나만으로 구성된 예술은 있을 수 없고 그 ‘순수’의 생성 자체가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 나타난 것이라서 작가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돈, 권력, 명예를 의식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지나치게 작품에 반영했다면 ‘아! 내가 이런 예술관을 가지고 있구나.’는 자아인식을 갖는 것이 먼저고, 자신이 왜 다른 경향의 예술에 대해 편견을 가졌는지 이해하게 되고 결국 예술을 바라보는 유연한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즉 바로 예술관을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관의 경계의 유연함을 의미합니다.

 

박: 예술 자체가 목적인 작가와 자신의 부와 명성, 권력을 위해 예술이 수단인 작가의 이야기처럼 들리는데요.

 

엄: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순수하다’고 이야기 하는 이들 역시 예술은 아닙니다. 예술 자체가 목적이라고 말하는 작가들 역시 자신의 감정을(카타르시스) 표현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합니다. 결국은 그것이 내적인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 물질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든 예술은 수단으로 이용되어왔고, 결국은 어차피 사회 구조적으로 양쪽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 두 관점을 섞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예술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자신의 경계선에 유연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성숙한 작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고민은 이제 갓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들보단 일정 기간 활동을 한, 모든 단계를 거친 작가들만이 깨달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박: 예술가들이 자신의 세계를 지켜가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엄: 소크라테스는 다른 소피스트들과는 다른 차이가 많았는데 특히 그는 돈 때문에 강의를 하거나, 돈 때문에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부분으로 생계를 유지했겠지만, 왜 우리가 소피스트보다 소크라테스를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는 철학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소피스트들은 지금의 일부 변호사들처럼 사람들이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을 정당화 해주는 역할을 해주던 시대에 그는 ‘진실이 무엇인지’만을 추론해 나가다보니 당연히 돈을 벌긴 커녕 사람들의 증오를 사서 수난을 당했습니다.

만약 ‘철학’의 목표는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고, 미술의 목표가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이여서 작가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다가 우연히 시대의 ‘아름다움’의 가치와 일치하거나 보완관계이면 사람들이 그 작품에 물질적으로 지불하게 되지만, 하지만 작가의 방식이나 이념이 시대와 다르다면 보상은커녕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예는 미술사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구조적으로 당연히 수난은 받게 되어 있어있고, 작가가 그럼에도 자신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생계적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한 예술가들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있어왔습니다. 결국 자신의 작업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그 생계를 지킬 수 있도록 작가의 세계를 이해해주는 후원자를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후원자 못지않게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대중 역시 좋은 후원자 일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미술교육을 본다면 지금처럼 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사라지는 기술교육이나 미술사 소개 보다는 오히려 실기를 통해 사물을 심리적 관점에서 보도록 하는 교육이 진짜 미술교육이라고 믿습니다. 만약에 기술 교육이 아닌 심리교육을 시킨다면 그 사람에게 미술이 생활화되어 세계관으로 승화돼서 자기 주변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 부분에선 지금의 교육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과거 미켈란젤로나 고호 역시 지금의 작가들이 겪는 같은 문제를 겪었고 여하튼 작가들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하고 최대한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 유연한 태도란 어떤 것인지.

 

엄: 사회의 모든 일이 그렇지만 예술 역시 약간의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 필요한데, 외로울 필요는 있지만 쓸쓸할 필요는 없습니다. 명예나 돈에 작업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순수성이 훼손 되고, 너무 멀리 있으면 존재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자신만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 적정 거리는 작가 본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Lee Frost)의 시 ‘좋은 담’엔 ‘좋은 담은 좋은 이웃을 만든다.’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마치 제주도의 낮은 담과 비슷한데, 너무 담이 낮으면 소통이 안 되고, 담이 아예 없으면 싸움과 분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담을 쌓느냐.’에 따라 주변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 그 높이는 자기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 접점을 찾기 위해 주변을 고려하는 것은 타협도, 타락도 오염도 아닙니다.

 

박: 개인적으론 관객과의 담이 높은 편입니다. 관객들은 작품보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전 관객들이 작가가 아니라 작품과 소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에서 제가 의도한 바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도 없고, 단지 그들이 보고 자신의 것으로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제 관객들은 제게 불평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엄: 작가가 홀로 마음 깊숙이 끄집어낸 것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 같아 보이는데, 작품에 직접적인 설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약간의 곁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어차피 커뮤니케이션에선 상대방이 있는 것인데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채널을 필요한 일입니다.

나는 철학자로서는 비교적 남들과 잘 지내는 편인데 그것은 내게 예술적 기질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예술적 기질이란 것이 타인과는 잘 지내면서 나 자신과는 잘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나 자신과 잘 지내보기 위해 일부러 당진 시골집에 내려가서 힘들게 고생하며 나와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내 생각엔 예술가들은 근본적으로 작가 자신과의 관계가 힘들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잘 못 지내고 자기와 잘 지내는 작가들의 작품은 예술적인 힘이 약하지 않겠어요.

 

박: 저 또한 스스로와의 관계가 매우 힘들고 또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답이 없는 싸움을 하다보면 ‘도대체 이게 누구를 위한 일인지.’, ‘왜 이렇게 힘들게 고민해야하는지.’,‘남들은 잘만 편하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런 사소한 일 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는지.’ 처럼 문득 문득 회의감에 들곤 한다. 좀 더 가볍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편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자신과의 힘든 싸움은 예술가들에겐 감당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인지요.

 

엄: 행복의 문제는 좀 다른 문제이지만 철학자나 예술가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즐거워야하고, 인생 계획이 있어야한다. 직장인이든, 기술자든, 예술가로서 모든 사람들에겐 인생 계획이란 것이 있고 이것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느낌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타인과 어느 정도 잘 지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고 타인을 무시하게 되면 행복이 깨지게 됩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사회적 충족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만약 이것이 너무 좋아서 거리가 없어지면 ‘자기’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행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사회적인 것에 취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지낸다면 일부러라도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의 경우에도 철학자이면서 다양한 직책을 감당해야만 했었는데, 간혹 다른 학교나 단체에 특강을 하러가게 되면 존재로서의 ‘나’가 아닌 직책으로서의 ‘나’를 나열하면서 소개하는 걸 들을 때면 낮 설기도하면서, 솔직히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나’이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나’이지 않겠습니까. 특히 철학이란 학문은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라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된 조국에서 잊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러한 직책들을 맡으면서 간혹 정치, 사회적 현실에 교육자로서 점차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결국엔 그 일에 합당한 인물로 만들어 지는 것 같습니다. 직책들을 감당하면서 그 사회의 사람들을 알게 되고 또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내가 넘어가지 않는 한 폭이 넓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다른 일들이 나를 다양하게 하고 철학을 하는데 있어 이야기 소재가 많아지고 강의를 하게 돼도 관념놀이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볼 때 학생을 가르친다고 했는데, 예술도 사명감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예술적 감각을 발견하고 찾아주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닌 한 유명한 안과 의사는 요즘 들어 남의 눈에 관심이 없고, ‘본다는 것’이 뭔지 생각하게 된다는 들었을 때 참 멋지다고 느꼈고 이렇게 머리좋은 사람들은 순수학문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박: 개인적으로 그 말씀에 동감하는데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1%의 사람들은 정신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볼 때 사회와 사람들을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주의’ 같은데 왜 많은 좋은 생각과 믿음들이 시대철학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엄: 우리가 '순수‘라는 주제로 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사실 좀 어려운 개념이다. 흔히 말하듯이 종교가나 예술가, 철학자들은 순수하고, 현재 사람들이 닮고자 하는 기업인을 두고 그들이 기업인이기 때문에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너무 난(蘭)을 좋아한 나머지 일에 집중도 못하고 자신조차 잊게 되자 난을 다른 이에게 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즉 우리가 사람이든 일이든 돈이나 권력이든 나를 순수하지 않게 하는 건 그것이 나를 순수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것이 자신을 잊게 만들고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한다는 것이지 결국 그것이 돈이나 명예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작은 식물이더라도 자신을 잊게 만든다면 식물은 이 사람의 순수함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순수라는 건 자신의 어떤 대상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혼탁해지는 문제이지 난은 아무리 좋아해도 되고 돈은 안 되고 식의 대상의 문제는 아닙니다.

 

박: 선생님 책에서 ‘청빈’,‘충성’이란 행동들이 이 시대와 세대에 그것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귀하단 말씀이 떠오르는데 ‘순수’역시 예술가들에게 같은 개념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옳다는 것을 알고 지켜져야 하지만 여러 주변 문제들 때문에 타협을 하지 않기란 굳은 의지가 필요하고 쉽게 선택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엄: 제가 한 수녀원에서 특강을 한 일이 있었는데, 중세 때 수녀원에서 수녀생활을 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어느 정도 수녀원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관능적 쾌락위주의 ,과학기술, 공리주의적 윤리관등이 야합한 시대에 수녀생활을 하는 건 훨씬 더 어렵습니. 그렇게 때문에 지금의 수녀들은 귀하고 고귀하고 그 존재적 가치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이야기 한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 ‘금각사’로 유명한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미시마 유키오(Mishima Yukio)는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나는 나 자신으로 한번 존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여의치 않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너무 존재감 없이 사는 한 인간이 절을 불태우는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소설은 심미적 실존주의라고 할까. 때문에 우리가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폭이 넓고 깊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게다가 어려운 시대에서 당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가서 경계를 넓게 칠수록 지키고자하는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삶의 모든 순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철학과 예술을 하는사람들에게 태평성세는 불운이라고 이야기들 하고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는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람들이 이런 시대에서 철저히 살아내는 것,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주는 것을 이야기 한 것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일 밖에 없습다. 그럴려면 ‘위대한 낙관주의’, 긍정의 힘이 필요합니다.

 

박: 위대한 낙관주의란?

 

엄: 더 멀리, 깊이, 넓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지금의 비관스러운 상황이 왜소하게 보이게 됩니다.

 

박: 제겐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긍정적인 마음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분명 제가 지키고 싶은 세계를 위해서라도 현상들을 좀 더 넓고 깊이 보면서 자신의 경계선을 넓게 가져야 가능하다는 것을 공감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긍정적이긴 매우 힘듭니다.

 

엄: 긍정적이란 것이 착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자아인식에서 출발해서 또 상당히 객관적인 현상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깊이, 넓고, 멀리 본다.‘는 것을 파도의 예를 들자면 파도를 보고 그것이 실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조금만 깊이 본다면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되고 겉에 나타난 파도의 실체가 바다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상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질까를 짐작하는 일이 멀리 보는 일이고, 지금의 현상만 보자면 사실 가치가 없어 보이고 긍정적이기 힘들겠지만 이를 깊이 있게 보게 되면 이럴 수밖에 없던 필연을 알게 되고 또 그 안의 자신을 발견하면서 다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든지, 적어도 시대의 역할을 깨닫게 된다면 예술가로서 안목을 갖게 되고 그것이 위대한 긍정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박: 혼란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진실’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사람들과의 소통의 방법도 다양해졌지만 오히려 다양화된 통로가 쏟아내는 진실인척 하는 이야기에서 무슨 말을 믿어야하는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렵고, 그러기에 더 방황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엄: 현대인은 주로 매스컴이 제공하는 사이비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피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매스컴이 사회의 거울로 역할을 하면서 주는 순기능의 해택들, 넓은 세상을 빠르게 그리고 상당한 부분은 제대로 전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살고 있다고 봅니다. 그에 못지않게 매스컴을 사업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또한 대기업이기고 하기 때문에 언론사 입장에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선정주의나 과장된 기사들을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을 부풀리거나 금방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일들을 비일비재하게 대하다보면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접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언론사뿐 아니라 모든 국가가 이용하는 것인데, 국가가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매스컴을 사용해서 선전하기도 합니다. 구조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박: 저는 정말 매스컴에 대해선 낙관적 이기가 힘듭니다. 예를 들면 요즘 사람들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고들 합니다.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어떤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엄: 철학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을 전할 때 진리가 된다. 하지만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자신의 마음을 믿을 때 진실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매스컴에 관련된 이들 역시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전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전할수도 있고, 조금 부족하더라도 마음을 다해서 이야기 할 땐 ‘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할 때 어떤 이가 사실과 관계없이 어떤 일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그에겐 진실이었기에 탐지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처음부터 진리는 아니었다. 철학자들은 처음엔 진리라고 생각하며 추구했지만 어느 날부터 그 역할은 과학자들의 몫이 되어버렸고, 이제 철학도 마치 예술처럼, 마치 문학처럼 되어간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지금 철학자들이 ‘무엇’을 찾는 다면 ‘진리’이기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일이 많아졌고, 오늘 우리의 대화 역시 ‘순수’란 문제에 대해 진리이기보단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한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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