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는 어디에도 없다." 

 

'보통'은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방대하고 애매모호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설문 '보통검사'를 위주로 진행한 Archive <보통의 정의>(2013)가 '보통'을  정의(定義)해보고자 한 무모한 시도였다면, 그 원인들을 역(逆)으로 되집어본 <Now Here is Nowhere>(2016)은 '보통이 과연 정의(正義)로운가.'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정의(定義)가 불가능한 개념 '보통'을 역설적인 방식과 재현으로 되묻고 있어서 나 조차도 진행하는 내내 길을 잃고 헤맬 일이 많았다. 

 

출판물

 

설문'보통검사'의 분석과 해석은 2013년 Archive 전시를 마치고 2014~2015년 간 네덜란드에서 진행했다. 너무나 한국적인 개념인 '보통'을 유럽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 몰라 일종의 해석본인 영문 단행본 <Map of Nowhere>를(2015) 현지에서 출판했다. 
디자이너에게 요구한 주문은 단 하나, 독자들이 이 해석본을 읽으면서 헤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보통'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방향을 헤매는 것 같이 독자들 역시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복잡하게 꼬이는 답답함을 느꼈으면 했다. 그래서 이 책엔 페이지가 없다. 다시 말해 길을 잃어버리는 지도 책인 셈이다. 
 
 
cover final jan23-1.jpg invitation.jpg Nowhere cover.jpg

design by, Dongyoung Lee 

 
이번 '보통' 프로젝트는 총 3가지 출판물이 포함되는데, 한국 사람들이 '보통'에 집착하는 원인을 분석해보는 영문 해설책 <Map of Nowhere>와 전시 도록 <Now here is Nowhere> 그리고 개념 미술가 태이(Taey)와 협업한 시집 '통섬' 및 설문 '보통검사'의 답변으로 재구성한 극본 (劇本) '보통의 정의'가 포함된 잡문집 <Nowhere Man>이다. (잡문집 <Nowhere Man>은 2016년 여름 출간했다. 영문책 <Map of Nowhere>에선 아무래도 한글로 씌여진 원문의 느낌이 살지 않아 <Map of Nowhere>의 에세이 중 일부 글들의 한글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 ENG  


Map of Nowhere (2015) 

내게 오늘은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습관처럼 오늘을 포기하면서 오늘을 즐기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기다리던 미래도 과거가 돼버린 지금,
과연 수많은 오늘들을 포기할 만큼 미래가 가치가 있었는가 의문이 든다.
젊은 날,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사는 법을 알았더라면..
무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무엇을 하면 나아질 것도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약속하던 미래를 감싸던 희망이 사라지자
우울함과 빈정거림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
결국 미래도 아직 오지 않은 그저 그런 오늘일 뿐이다.
 
 
# intro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행복을 묻곤 한다. 
그럴 때 마다 나의 지인들은 여간 불편해하지 않는다. 물론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한지 알고 싶어서이다.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다.
 
“ 나는 행복한 걸까.”
 
한국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일을 한다. 남들보다 조금 덜 자고, 덜 먹고, 자신은 더 포기하며 애쓰며 일을 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변엔 초조한 일중독자들이 가득하다. 지금은 행복까진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괴롭혀가며 일을 한다. 그렇게 시간과 일에 쫓겨 기쁨은 무뎌지고, 의지는 약해지고, 감정은 귀찮아 진다. 
설렘이 늙으면서 나도 같이 늙어가고 있다. 
행복하지도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은 이 어정쩡한 상태를 다행이라고 믿게 되는 게 두렵다.
 

 

#8
'보통(botong)은 이들에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인 까닭에 '보통'으로 인식되는 것엔 그것이 '정상'이 아니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자, 이유도 중요치 않다. 모두가 적당히 비슷비슷 하게 살면서 뒤쳐져  루저 loser란 소리만 듣지 않으면 된다. 
그 어느 때 보다 '보통'이 보통이 아닌 시대에서 미치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들을 '보통'이란 이유로 하고 산다. 
거지같이..
 
 
#12
한때 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우울증과 같은 심각한 내적 갈등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우울증은 흔히들 ‘죽어야 끝나는 병’이라고 일컫지 않은가. 
자살을 시도한 적 있던 동료 A에게 ‘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랬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평소 감정 표현을 잘 드러내지 않아 그녀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걱정이 많고 예민한 그녀의 성향 상 견딜 수 없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생각 외로 간단했다. 
 
“ 아무 이유 없어. 이 지루한 시간들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더라고. ”
 
죽고 싶은데 특별한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내 삶의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특히나 기계처럼 일만 하는 일상이 평생 이어질 것만 같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 질 것 같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면 내 인생 역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한국의 직장인 대다수가 앓고 있다는 번아웃(Burnout) 증후군 또한 야근 근무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와 치열한 경쟁 관계에서 지쳐버린 사람들의 대답이다.
한국인들의 불안과 우울의 원인을 찾아나가는 이번 지도 작업을 진행하면서 주변에서 지켜보던 미국인 동료가 묻는다. 
 
“ 북한의 사람들과 남한의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냐고.”
 
이 질문은 자유가 없는 희망과 희망이 없는 자유 중 어느 삶이 더 불행하다고 여기는지 묻는 것과 같았다. 난 희망이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 희망 없이 몸만 지쳐버리면 모든 게 귀찮아진다.
아무 이유 없이 끝내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그냥 여기가 아닌 곳에서 좀 쉬고 싶을 뿐이다.
 
 
#13
난 나라 전체가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던 시절에 10대(代)를 보냈다. ‘World's Best' 문구는 1990년대 초반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달성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광고 카피로 삼성이 대한민국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얼마 가지 않아 자연스레 ’World's Best Korea'란 슬로건이 온 국가를 뒤덮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삼성은 애플과 세계 1위 자리를 두고 특허권 분쟁으로 조용한 날이 없고, 세계 1위가 되어 돌아오는 건 짧은 만족과 끝날 것 같지 않은 다툼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외로움과 초조함이다. 
 
 
#14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바쁜 척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오히려 그 허전함을 어찌할 바 몰라 한다. 나는 그 원인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과 마주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공부에 재주가 없는 아이들을 12시간 넘도록 책상에 앉혀두는 것도 부모의 불안 때문이고,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의식에 주말에도 출근하는 직장인도 극심한 취업난에 자리 보존하기 위한 몸부림이며, 자식에겐 좋은 것만 물려주고자 낮밤 가리지 않고 가게를 여는 것도 혹시라도 쓸모없어 내쳐지는 존재가 될지 모를 불안 때문이다. 즐겨야 할 지금은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떨치고자 일중독자들이 되간다. 
 
 
# epilogue
처음엔 사람들이 우울한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들의 우울은 언제나 돌아가는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알면 알수록 생각지도 않던 이유들을 발견했고 모든 것이 치밀하고 단단하게 연결돼 있었다. 
어느 하나 단순한 것이 없었고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동의 하진 않지만 어떨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것들... 사람들은 그것을 생존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억압하고 외로워했다. 
오늘이 어제의 결과이자 내일의 원인인 것처럼 모든 것이 원인이자 결과였다. 마치 출구를 알 수 없는 요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각 원인들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을 잃어버리기 일 수였다. 길을 알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길을 헤매게 하였다. 
길을 따라갈수록 계속해서 끝이 없는 어두운 깊숙한 길이 나온다.  
진실에 눈이 멀고 침묵하는 사람들이 자기 그림자의 어둠에 괴로워한다.
늘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결코 어디에도 존재한 적 없는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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